'칼럼' 양극단을 넘어서...

임철의 | 기사입력 2007/03/28 [10:38]

'칼럼' 양극단을 넘어서...

임철의 | 입력 : 2007/03/28 [10:38]


아시아 경제의 대표적 성공신화로 꼽힐 만큼 급속한 발전을 이룬 한국이 때 이른 '중년(中年)의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고 지적한 파이낸셜 타임스(FT)의 3월 27일자 사설은 기자를 상념에 빠뜨렸다. 서구에서는 고전적 주제가 된 지 오래지만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 이르면서 우리 사회에 첨예해진 좌-우 이념의 대립적 인식문제에 새삼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가 어려움을 겪는 이유로 높은 수출 의존도, 편중 심한 제조업, 재벌의 행태, 규제 관행 등을 든 뒤 회생을 위해 필요한 노력들까지 언급한 사설은 “(하지만)한국은 여전히 잠재력을 갖고 있고, 역사적으로도 정치적 지도력이 제대로 발휘되면 새롭게 역동성을 얻을 수 있음을 입증했다”고 했다. 보기에 따라 정치적 함의가 노골적인 것으로 읽힐 만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끄는 현 정부는 유감스럽게도 역동적인 개혁을 추진할 만한 비전과 정치적 과단성이 부족하다”고 겨냥한 대목이 그렇다.

#좌-우 이념들이 겪어온 어이없는 역설

어쨌거나 기자는 역설을 느낀다. 개혁을 전매특허처럼 내세워 온 참여정부, 즉 좌파적 진보 집권세력의 개혁 의지와 능력을 정작 형편없는 것으로 평가했기 때문이다. 참여정부는 정말 형편없었나? 부동산 정책은 임기 중반을 넘어서기까지 큰 실패를 되풀이 했지만 최근엔 안착한 셈 아닌가?

기자는 좌-우 이념이 인간 사회(경제)를 기본적으로 어떻게 인식하는지 재정리해봐야겠다는 충동을 느꼈다. 워낙 잘 알려진 논제이지만 아카데미즘의 난해함을 벗어던지고 거칠지만 저널리즘의 단순명쾌한 시선으로 들여다봄으로써 특정신문 사설에 대한 가치판단을 넘어 동시대를 보는 나름의 시각을 갈고 싶었기 때문이다.

특히 청주지역만 해도 특정 아파트의 분양가를 놓고 청주시가 ‘분양가상한자문위를 구성한다’, ‘비싸다. 가격을 내려라’ ‘비싼 게 아니다’… 시끌시끌했는데 이 논란의 배경에도 기본적으로 양립하기 힘든 좌-우 이념의 대립적 시각이 자리하고 있다.

우선 좌파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도덕적일 수 있다고 믿는다. 사회도 물론이다. 인간이 탐욕만 좇는 존재는 아니라는 믿음, 또 그렇게 되어서는 안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좌파적 신화는 이렇게 탄생한다. 그래서 사회정의, 곧 평등을 위해서 인간의 더러운 탐욕은 억눌러야한다는 종교적 신앙도 생겼다.

그럼 매사를 판단함에 있어 어느 것이 사회정의에 부합하고 또 어긋나는 것인지를 최종적으로 누가 판단한단 말인가?
지금은 박물관에 들어가 있지만 공산당이다. 인간이 사는 땅에서 신성한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탄생시킨 만큼 공산당에게 절대 권력을 부여하는 건 당연했다. 이렇게 좌파혁명은 무시무시한 일당독재 권력을 합리화했다.

소련의 수용소군도와 독재 권력을 더 공고히 하기 위해 벌어진 중국의 문화혁명은 도덕성을 내세운 공산당과 최고권력자의 비도덕성을 만천하에 드러낸 인류역사 최대의 역설적 비극이었다. 공산당이 늘 도덕적이라고 믿었단 말인가? 설령 그렇더라도 도덕적이면 모든 문제가 절로 해결되는가?

#매사 도덕을 앞세우거나 사회적 의무를 태만히 하는 것 모두 문제

하지만 유럽식 사회주의는 소련과 중국에서 시도된 공산주의 혁명이념과 사뭇 다르다. 훨씬 덜 교조적이고 인간적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보다 도덕적인 사회, 평등한 사회,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신화적 믿음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는 출발점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믿음을 실현하기 위해 가격통제를 비롯한 각종 규제 장치 발동과 복지확충을 위한 고율세금 부과 정책 등 계획적 사회주의 체제를 선택하는 것이니까.

그렇지만 유럽 사회는 역사적으로 좌파 정부들에서 비효율과 개인의 창조성 저하, 통제 및 계획 경제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나타난 ‘관료주의’로 경제 활력을 잃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도 최근 몇 년간 이런 과정을 겪어온 것은 아닌가?

더구나 좌파 이념주의자들은 자기 이념에 대해 교조적 믿음을 갖는 경향이 짙다. 그래서 갈수록 복잡해지는 경제 시스템 속에서 교묘해지는 시장에 대응할 정책 수단을 마련하는 데 있어서도 전문 지식보다 ‘도덕성’을 우선시한다.

정책실패는 여기에서 비롯한다.

나아가 자신이 선점한 도덕률에 반해 보이는 정책이나 생각, 의견은 ‘부도덕’하거나 ‘보수 꼴통들의 저항’, 나아가 '악(惡)'으로 손쉽게 치부한다.

참여정부가 부동산 정책에서 실패한 것 역시 ‘부동산 가격의 비이성적 급등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당연한 경제 정의적 믿음만 앞세웠지 왜 가격급등을 일으키는지에 대해선 이해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가격급등을 부채질하는 시장메커니즘을 이해 못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단지 부동산 신화를 잡으려 이리저리 쏠리는 국민들이 부도덕해 보였을 것이다.

이념의 맹목성이 말 그대로 사람의 눈을 멀게 하는 경우가 좌파 사회에 만연했다는 건 역사적 경험이다.

#진정 양극단을 잡음으로써 위대해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우파적 신념은 어떠한가?

자본주의 경제의 요체는 개인소유의 무한한 보장이라는 고전적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다. 무덤에 들어간 지 너무 오래 돼 시야에 보이지 않게 된 게 언제인지도 모를 지경인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아직도 움직인다고 착각하고 있다. 강자와 약자를 같은 출발선에 서게 한 뒤 무한경쟁에 내몬다.

그렇게 끝없이 개인의 소유욕을 자극함으로써 경제발전의 최대원동력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많은 사람이 “돈 돈 돈”하며 부(富)만 좇는 부나방이 되기 일쑤다.

자유주의 경제 신봉자들이 결정적으로 놓치는 함정은 바로 여기에 있다. 부동산 사태에서 목격하듯 개인 소유를 무한정 신성시하고 아무런 통제장치도 갖지 않을 때 가격폭등은 고삐가 풀렸다.

이렇게 되면? 사회 붕괴를 걱정해야 할 지 모를 일이다.

소유욕이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동력이면서 동시에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기제로 작용한다는 것은 좌파적 사회주의(특히 공산주의)에서 경험한 역설적 비극과 크게 다를 게 없다.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이 좋은 예지만 자본주의의 취약성은 경제 시스템을 늘 불안하게 한다는 데 있다. 기업이나 개인이나 모든 경제주체들이 자기 이익의 극대화만을 위해 움직이다 보면 공동체 사회가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는 ‘사회적 의무의 태만’에 빠지기 십상이다. 각종 추악한 스캔들이 이를 반증하지 않는가?

그래서 소련과 중국이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자유주의 사회는 자본주의의 취약점을 보완하는 쪽으로 가고 있는 건 당연한 귀결인 지 모른다.

올해 우리의 운명을 가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유력한 후보들은 물론 정치권에서 골통보수와 무능진보의 양극단에서 벗어나 중도적 가치를 표방하는 목소리가 부쩍 많이 들리는 것도 위와 같은 과정에서 깨달은 교훈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이것이 기회주의적 표변이나 처신이라면 곤란하다. 그동안 신물이 나도록 보아왔다.

“한 극단에 섬으로써가 아니라 양극단을 잡음으로써 위대해질 수 있다.”는 파스칼의 말처럼 진정 특정 이념의 맹목적 추종자로서, 또 천박한 지식의 포로상태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우리는 위대한 시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코 앞의 대선에서 신성한 참정권을 행사하는 데 있어서 뿐 아니라 앞으로 우리 사회, 나아가 세계 질서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넓은 시야를 확보한다면 그건 분명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임철의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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