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집 사장 박수훈 씨의 서예 인생도청 뒤편에서 오리골 식당하며 글씨 쓰기 병행-집안 곳곳이 예술향 풍기는 작품들로 즐비청주시 상당구 문화동 충북도청 뒷길 건설회관 맞은편, 적십자혈액원에서 중앙초등학교 뒤쪽 단독주택가로 찾아간 2층집. 이 집 마당에 걸려있는 ‘오리골’ 음식점 상호의 한글체가 눈길을 잡았다. 독특한 회화성이 느껴지는 글씨였기 때문이다. ‘오리집 식당 주인이 자기만의 독특한 서풍을 만들어가는 서예가라더니...소문대로였구나. 생업을 위한 바쁜 생활의 틈 속에서 망중망(忙中忙)의 글씨 쓰기에 빠져 지내는 서예가는 누굴까.’ 오리골 마당에 막 발을 들여놓는 순간 이 집 주인이자 33년째 운필(運筆)의 길에서 낙을 찾는 서예가 돌담울 박수훈씨(50)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안내로 집에 들어서는 순간 진한 오리탕 육수 냄새가 후각을 감쌌다. 꼭 미식가가 아니어도 이 집 오리탕 맛의 깊이를 혀가 아닌 코 끝으로 알아차릴 만큼 깊고 구수했다. 가볍게 점심식사나 해결하려는 손님을 위한 상차림으로 정규메뉴에 포함시킨 청국장 찌개 냄새가 파묻혀 버릴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손님을 즐겁게 만든 건 후각이 아니었다. 집안 곳곳에 박수훈 씨가 정교하게 연출하듯 ‘장치’해 놓은 예술적 분위기, 즉 그가 손수 쓴 글씨 작품들이 종합적으로 뿜어내는 예향(藝香)이 시각을 품격 있게 자극한 때문이다. 청실 홍실...많지 않지만 방마다 붙여놓은 방 이름 글씨, 손님 방 안 벽에 음식 이름과 값을 적어 붙인 ‘차림새’, 자신의 서예 작품을 목판에 새겨 걸어놓은 정취 묻어나는 작품, 걸개 등등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건 또 어떤가. ‘커피, 바쁠 때는 셀프입니다.’ 평소에는 주인장 박수훈 씨가 손님들에게 커피 대접을 하지만 객들이 밀어닥쳐 일손이 달릴 때는 직접 타 먹으라는 청(請)인데, 독특한 서풍의 글씨가 풍기는 분위기에서 선뜻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힘이 느껴졌다. 화장실 남성용 소변기 앞에 방(榜) 붙여놓은 ‘좀더 가까이’ 글귀는 말할 것도 없다. 주변 더럽히지 말고 소변기에 바짝 다가서라는, 툭하니 말을 절반 잘라 먹어 반말로 써 놓은 명령문인데도 불유쾌한 감정이 생겨나지 않는 이유도 딱딱한 강제의 의미를 독특한 미감의 서체가 완화시키고 있기 때문인 듯 했다. 누가 형식이나 틀이 내용보다 못하다고 한다면, 기자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를 오리골에서 보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명령투의 ‘좀더 가까이’ 글귀를 막글씨로 써 붙여 놓았더라도 같은 느낌이었을까. 방 안 곳곳에 자리한 박 씨의 글씨 작품들은 음식을 먹으러 온 손님들에게 기대하지 않은 기쁨일 게 틀림없었다. “벽지가 헐어버린 곳을 새로 도배하려다 사실 엄두가 나지 않았지요. 대신 꾀를 냈습니다. 긴 천에 쓱쓱 글을 써서 걸개처럼 헤진 벽지 위에 걸어 놓았는데 의외로 손님들이 좋아하시더라구요. 제가 고맙죠.” 오리 음식점의 주인장 박수훈 씨가 자신만의 독특한 서풍을 일구며 서예의 길을 30년 넘게 걸어가고 있어 화제다. 돌담으로 친 울타리란 뜻을 가진 듯 한 그의 호를 빌리자면 ‘돌담울 서풍’이라 부를만한 그의 글씨체는 이철수 판화가가 그러하듯 분명 또 다른 자기류를 구축하고 있는 듯 했다. 최근 대청호 미술관에서 열린 2007 한․중 서예문화교류전에 그가 출품한 작품 ‘샘’은 시제에 맞게 샘의 형상을 구현한 글씨의 회화성이 관람객의 눈길을 끌었다. 그리고 큰 글씨 ‘샘’ 아래 주요한의 시 ‘샘물이 혼자서’를 옮긴 글 역시 샘물이 흐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는 평을 받았다. “부끄럽습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무작정 모방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환한 맑은 미소가 편안한 인상인 박수훈 씨의 인생은 그러나 평탄하지 않았다. 예술가들이 대개 그렇듯 포도청처럼 무서운 ‘목구멍’이 그의 목을 진짜 졸랐던 때가 있었다. 1957년 닭띠 해 출생인 박 씨는 1974 운호고교 재학 시절 서예방에 가입해 붓과 첫 인연을 맺은 후 평생 붓을 제2의 반려자로 삼게 될 줄은 몰랐다. 학교를 졸업한 이후 1984년부터 1997년까지 조치원 대전 등지에서 서예학원을 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즐거움이 너무 컸다. 그에게도 배움의 세월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고민이 컸다. 가장 노릇을 제대로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1998년 고향 청주를 다시 찾았다. 모충동 서원학원 근처에서 식당집을 열어 고기도 팔고 학생과 선생님과 교수 교직원 등을 상대로 밤늦도록 영업했다. 악착 덕분에 차츰 생계가 안정됐다. 세속적으로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 그는 지난해 꿈에 그리던 숙원을 이뤘다. 2006년 봄 현재 오리골 식당으로 꾸민 2층 아담한 단독주택을 마련한 것이다. 모충동 식당 일 8년 만이었다. 1층은 오리식당으로 2층은 당장 그의 작업실로 꾸몄다. 그는 바쁜 식당일이 끝나는 대로 2층으로 달려가 중국에서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 나무판에 글씨를 썼던 이른바 목간(木簡) 서풍에서 영감을 얻은 그만의 독특한 서풍으로 글씨 쓰기에 돌입한다. 그에겐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예술 문화.. 삶의 양념이 아니라 자양분 그 자체죠. 바쁜 중에 취미 찾는 게 망중한의 기쁨이요 진정한 가치를 느낄 수 있어요. 시간이 펑펑 남아돌아가는 가운데 문화생산 뿐 아니라 소비를 할 수도 있지만 문화 마인드 없이 치열하지 않은 가운데 소비만 한다고 기뻐질 수 없을 겁니다.” 박수훈 씨는 서예가 안고 있는 현실을 걱정했다. 소위 디지틀 세대에 태어나 성장하는 젊은이들이 서예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격변하는 세상과 단절하지 않고 소통하는 가운데 서예가 활로를 찾아야 할 것인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대중과 호흡하는 것이 중요해요. 고상한 예술이 따로 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만 존재할 수 없을 거라고 봅니다. 설령 그리 존재하더라도 극소수를 위한 것에 한정되겠죠. 비주얼 시대에 맞춰 서예의 회화성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동시대 사회는 물론 서예계에서도 메인 스트림(主流)에 합류해 본 적 없는 그는 “내년 나이 50을 넘어 생애 첫 작품전시회를 가질 생각”이라고 했다. <저작권자 ⓒ 충북넷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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