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포커스] 채천석 前 충북개발公 사장

무고 벗고 사법적 명예 회복 … 사회적 명예도 되 찾아
콜럼비아에 공공주택 건설 및 공급 프로젝트 경험 전수

임철의 | 기사입력 2013/09/23 [06:39]

[인물포커스] 채천석 前 충북개발公 사장

무고 벗고 사법적 명예 회복 … 사회적 명예도 되 찾아
콜럼비아에 공공주택 건설 및 공급 프로젝트 경험 전수

임철의 | 입력 : 2013/09/23 [06:39]
오이디푸스는 아버지가 누군지 몰랐다. 신탁(Oracle)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저지른 참극이었지만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죽였다는 사실을 한동안 알지 못했다.

행위의 비극성과 죄질을 배제하면 오이디푸스가 사실을 언제 인지했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신이 인간 세상에 친부살해라는 끔찍한 원죄의 전형을 낙인찍듯 의식과 무의식의 중간 지대 깊숙한 곳에 새겨 놓았다는 점이라면 모를까.

다음에 거론하려는 사례는 친부살해의 변형이라는 점에서 개운치 않은 맛을 남긴다. 생명을 주고 위태롭던 목숨까지 구해준 아버지를 등 뒤에서 찌른 꼴이었기 때문이다.

 

▲ 채천석 전 충북개발공사 사장.    

채천석 전 충북개발공사 사장(61)이야기다. 

창립 후 3년 연속 적자의 수렁에 빠져 존폐기로에 서 있던 조직을 취임 1년 만에 기적처럼 일으켜 세우는데 성공했지만 정작 그는 등 뒤에서 날아 온 음산한 모의의 투서에 맞아 깊은 상처를 입고 쓰러졌다.

성공 가능성이 없는 사업을 분석해 구조조정하고, 조직혁신 작업을 통해 충북개발공사를 살려낸 게 그였다. 그는 그러기 위해 밤낮없이 뛰었다.

당장 직원들에 대한 전문소양 교육을 과외 공부시켰다. 직접 선생으로 나섰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격언을 가장 뼈아프게 필요로 하고 있던 게 충북개발공사 조직이었다.

사업수행능력을 배양하는 게 긴요했다. 직제 혁파와 충원도 병행했다.

◇ 3년 연속 적자 충북개발공사, 1년 만에 흑자 공기업으로 탈바꿈

밖을 보아도 사고무친이었다. 대외기관과의 관계망은 찢어져 있었다.

내부의 부끄러운 모습을 몽땅 끄집어내 보여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사업 및 조직의 과감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선 내부의 뒷받침뿐 아니라 지역사회의 이해와 협조가 중요한 전제로 떠올랐다.

충북도와 충북도의회에 충북개발공사의 실정을 설명하고 필요한 조치들이 무엇인지 설명해 나갔다. 언론은 물론 사회단체도 확보해야 할 중요한 협력대상이었다. 그들의 이해와 지원 없는 개혁은 결과가 뻔했다.

동선이 넓어지고, 만나야할 대상이 확대됐다. 관련 비용 지출이 늘어났다.

무형의 자산인 조직 안팎의 지지와 이해를 얻기 위해 불가피한 최소한의 경비라고 생각했다. 거시적으로 그의 판단은 적확했다.

자신이 조직의 수장으로 부임하기 전에 빗발치던 충북개발공사 해체론을 잠재우고 우호적 여론을 일으켰다. 이 덕분에 개혁 드라이브에 시동을 걸 수 있었다.

될 성 부른 사업들만 추리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정리했다. 지역공약의 성격이 짙은 사업들을 구조조정하는 일은 정치 논리가 개재되기 쉬운 과정이었지만 뚝심으로 밀고 나갔다.

고율의 자금조달 금리를 절반 가량 낮추는 노력을 통해 지불하지 않아도 될 금융비용도 절감했다. 언제까지 계속될 것만 같던 터널 저 쪽에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초 예견된 누적적자규모가 2009년 말 3330억 원, 2010년 5077억 원이었던 충북개발공사였다.

2009년 초 전문경영인 공모를 통해 사장에 취임한 그는 그런 조직을 부임 1년 여 만에 40억 흑자의 공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토지공사 충북본부장을 지낸 그는 누구보다 부동산 개발 및 도시계획 분야에 경험과 지식이 풍부했고, 이를 고향을 위해 아낌없이 쏟아 붓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자신이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충북개발공사 사장 직위는 그에게 그런 의미였다. 조직에 숨통이 트이고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게 가장 큰 수확이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 개혁 불안감에서 비롯된 투서 … 안타깝게 낙마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써나가려한 성공 신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임기 계약기간은 2009년 1월부터 2012년 1월까지 3년이었지만 돌연 중단됐다.

2010년 투서가 그의 발목은 물론 목덜미까지 낚아챈 것이다. 2300만원에 달하는 돈을 유용했다는 혐의였다.

대외업무 추진과정에서 쓴 돈이 문제라는 것이었다. 업무상 횡령혐의가 씌워졌다.

구체적인 액수까지 적시된 투서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짐작이 갔다. 하지만 탓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짐작컨대 숨 가쁘게 진행해 온 개혁에 대한 일부의 불안감이 그런 행동을 부추겼으리라. 그러나 그나마 부질없는 일. 당장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가 사실과 다름을 증명하는 것이 중요했다.

"조직을 살리기 위해 숱한 외부 인사들을 만나 식사와 설득을 곁들인 대화를 하고, 골프를 친 것이 횡령이라니. 23000 여 만 원의 지출경비 중에서 단 한 푼이라도 내 호주머니로 빼돌린 것이 있었던가? 그런데 어찌 비난 받아야할 범죄행위로 둔갑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조직을 위해 모든 것을 던져온 지난 시간을 원망하지 않았다. 정열을 쏟은 것이 아깝지 않았다.

그래서 아름답게 마무리하지는 못할망정 스스로 더럽힐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판결이 나기 전까지 무죄를 추정하는 법 원칙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자신 배울 만큼 배운 법학도(고려대학교 법학과 졸업)이자, 부동산관련(도시계획) 박사학위까지 취득한 전문가였다. 하지만 모든 것을 던지기로 했다.

판결을 기다리지 않고 사장직위에서 사퇴했다. 자연인 신분에서 무죄를 입증해내고 싶었다. 착복한 적이 없지만 문제로 떠오른 업무추진비도 반환했다. 공적으로 쓴 돈을 사재로 메운 것이다.

◇ 1심 선고유예이어 2심과 대법원에서 무죄…사법적 명예 회복

'혐의의 일부분을 인정하는 대가로 법의 심판을 완화하는 것이 좋겠다'는 변호인단의 타협안은 수용할 수 없었다.
 
조력 없이 홀로 법률 대항에 나섰다. 진실의 힘을 믿었다. 없는 죄를 인정하는 대가로 받지 않아도 될 벌을 경감 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단 한발짝이라도 양보한다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었다. 명예가 걸린 문제였다.

힘겹고 외로웠지만 의미 있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재판부도 진정성을 바라봐 주기 시작했다. 당시 충북개발공사가 처했던 상황과 대표로서 취했던 일련의 행위의 불가피성을 이해시켜나가는 데에는 화려한 논변이 필요 없었다.

진정성과 거짓 없는 언행은 재판 내내 그가 갖고 있었던 유일한 대항무기였다. 법학 전공 이력도 힘이 됐다.

재판부가 기소자의 체면을 살려주는 동시에 피고인의 무혐의를 인정하기 위해 종종 동원하는 판결인 ‘선고유예’마저 그가 받아야 할 온당한 몫이 아니었다.

법조계에서는 ‘선고유예는 사실상 피고인의 승리’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에게는 이조차도 억울한 결과일 터였다.

그에게 처음부터 완벽한 면죄부가 내려진 건 아니었다. 2011년 1월 28일 1심에서 미완의 승리인 선고유예 판결이 나왔다. 항소했다. 무죄 확신을 타협할 수 없었다.

2011년 9월 23일 2심에서 그는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번엔 검찰이 상고했다. 결국 대법원의 최종 판단까지 받게 된 이 사건에서 2심 판결이후 1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2012년 7월 12일 드디어 대법원의 상고 기각판결을 통보받았다.

대법원이 검찰의 상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완벽한 승리가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무죄. 길고 외로웠던 법정에서의 진실 공방에서 그는 그렇게 사법적 명예를 회복했다.

◇ 사법적 명예에 이어 사회적 명예 스스로 찾아

그러나 그는 부모로부터 뼈와 살을 받아 성장한 고향 청주에서 홀연 모습을 감췄다. 지역사회는 그를 잊었고, 세월은 뜀박질하듯 흘렀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당시 사건에 대한 그의 소회 역시 궁금했다. 수원에 거주하는 그를 만났다. 그는 사라진 게 아니었다.

"사필귀정을 믿었지만 오랜 시간을 끌면서 초조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법부에 의해 명예가 회복되는 순간 정말이지 기뻤습니다. 허탈하기도 했고요. 만약 진실이 패배를 했더라면...상상만 해도 끔찍합니다. 하지만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했을까? 아쉬움이 큰 것도 사실입니다. 불미스러운 일이었고, 제가 감수해야 할 몫이라면 그저 수용할 뿐입니다. 조직을 위한다는 선의와 명분은 뚜렷했지만 당시 제가 좀 더 인내심과 융통성, 그리고 포용력을 가지고 개혁 작업에 전 직원의 이해와 동참을 유도했더라면 개혁저항을 최소화했을 수도 있었을 것 아닌가... 그런 생각도 가져봅니다. 당시 조직이 처한 상황이 아무리 위중했다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당시를 애써 회상하고 싶지도 않고 더더구나 특정인을 지목해 탓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이 모든 것은 내가 짊어져야 마땅한 업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게 부질없는 노릇입니다."

자신의 불찰로 인해 고통을 겪은 모든 직원들에게 지금도 미안하다고 했다.

뒤늦게 신학대학원에 진학해 2년간 종교공부를 치열하게 했다고 했다. 원망 미움 같은 감정은 가까이하지 않은 지 한참 돼 어색하다고 했다.

- 근황이 궁금합니다.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요.

"정부(기획재정부)에서는 한국개발연구원(KDI)과 손잡고 2004년부터 공동으로 개발도상국들의 경제·사회 발전을 지원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일명 '개발 동반자 국가', 다시 말해 'DPC(Development Partnership Country) 지원 사업'이 그것입니다. 경제협력 증진을 목표로 협력 대상국에게 발전을 도울 연구와 정책자문, 교육·연수 등을 통합한 '경제발전경험 공유사업(KSP=Knowledge Sharing Program; 지식 나눔 프로그램)'도 그 중 하나입니다. 저는 토지개발공사 근무 경험과 도시계획 전문가로서 중남미 국가인 콜롬비아의 공공주택(public housing) 부문에 대한 정책 조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가 추석연휴 기간을 전후(9월 13일~23일)해 콜롬비아를 다녀온 것도 이 때문이라고 했다.  중요한 임무를 띤 에이전트로서 국가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데 참여하고 있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DPC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추진 중인 2013년도 KSP(Knowledge Sharing Program) 과제의 하나가 "콜롬비아 대단위 주택단지 건설사업"입니다. 콜롬비아의 주택도시국토부(MHCT : Ministry of Housing, City and Territory)의 요청에 의한 사업으로 수요조사서에서 대규모 주택단지 개발과 공공임대주택(Large Scale Housing and Public Rental Housing)에 관한 정책조언(public advice)을 하는 것이 제가 해야 할 몫입니다.

우리나라가 1970년대 향도이농(向都離農) 현상으로 발생한 수도권 집중현상과 급속한 도시팽창으로 인한 서민 주택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도입하였던 공영개발과 공공임대주택 정책의 공과를 ‘경험의 공유’차원에서 소개하고 전해 줄 생각입니다.

콜롬비아 정부가 생각하는 임대주택법에 준거, 해당 법률이 정하는 건설 촉진(자금조달방법 포함)과 공급(대상자, 임대료 등)에 관한 제도적 장치를 언급하고, 그 운영의 성과와 문제점을 제시하는 것이 제가 할 일이리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현지 확인 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문제점을 우리나라의 대단위 주택단지 건설 과정에서 경험한 문제점과 비교 분석하여 타당성 있는 정책 대안을 제시할 생각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업체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그가 내민 명함에 'RE 테크놀로지 대표 채천석'이라는 글자가 박혀있었다.

부동산 전문가이니 'Real Estate(부동산)‘의 두문자를 상호로 딴 것이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RE는 real expert(진정한 전문가)를 의미한다"라며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RE 테크놀로지' 사업체도 운영

"상하수도는 도시가 기능하는 데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시설들입니다. 낱말의 개념 때문에 양자 간에 우열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수도 없이 상수도만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유기체 역시 먹기만 하고 배설하지 않으면 생명유지가 불가능합니다. 잘 먹고 잘 배설해야 건강한 생명체입니다.
 
같은 논리로 부동산 시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요 몇년새 부동산경기침체가 심각합니다. 여파로 각종 재건축, 재개발사업이 좌초했거나 파산 일보직전에 이른 경우가 허다합니다. 서울에만 수백곳에 이른다고 합니다. 조합을 정리하려해도 이미 얼키고 설킨 자금 및 법률적 이해관계로 움짝달싹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부동산 시장을 어렵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와 같은 과정에서 발생하는 체증현상입니다. 부동산 시장의 선순환 고리를 끊어버리는 기제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부실 조합들이 제때 정리되지 않다보니 부동산 개발 시장의 질서가 잡히지 않고, 그것이 부동산 경기회복을 더욱 지체하게 만드는 암초가 되고 있습니다. 하수구를 뚫어줘야 상수도를 맘껏 사용할 수 있듯이 부동산개발 관련 조합들의 원활한 퇴출을 돕는 것이 긴요한 과제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법률적 이해관계가 얼키고 설켜 있기 일쑤여서 조속하고 원만한 해결이 쉽지 않은 게 현실입니다. RE테크놀로지는 이런 분야에서 전문가적 식견과 지식을 제공, 조합들의 활로 및 퇴로개척을 돕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서울시가 '뉴타운 추진ㆍ해제구역 지원방안'을 마련한 것은 시의적절한 정책대응입니다. 문제 있는 뉴타운 개발조합의 퇴출을 도움으로써 보다 빠르게 부실조합을 정리하겠다는 의지가 읽힙니다. 이런 것은 정책이 대응해야 할 몫입니다.
 
RE테크놀로지는 뉴타운 출구전략 같은, 정부나 지방정부의 정책을 민간차원에서 보완하는 역할뿐 아니라 독자적으로 전문용역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복잡한 이해관계를 법률 및 금융 측면에서 해결할 수 있는 솔루션을 마련해주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가 정말로 도시계획 및 부동산 분야의 진정한 익스퍼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수십년간 학습하며 경험을 통해 쌓은 전문 식견을 동시대를 위해 의미있게 투여하며 스스로 존재가치를 확인해 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넌지시 의중을 살폈다. 고향인 청주에서 지역 발전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다시 한번 갖고 싶지 않은지.

"욕심을 부린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모든 게 그렇지만 하고 싶다고, 억지로 한다고 이뤄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설령 그가 사법적 명예에 이어 고향에서의 사회적 명예까지 회복받고 싶어 한다고 한들 누구도 그것을 욕심이라고 탓할 수는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도민 세금과 충북도의 행정 에너지를 소모시켰을 지 알 수 없었을 골칫덩어리 충북개발공사를 살려내고 자신의 많은 것을 던져버린 그에게 고향은 청산하지 못한 빚을 안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 임철의 대기자

◇ 채천석 약력
 
▲ 학력 
  - 청주고교
  - 고려대 법대. 미국 USC 도시계획(성장관리계획에 관한 연구) 석사
  - 단국대 도시계획 박사
  - 고려대 대학원 법학박사(공익사업을 위한 간접손실 보상에 관한 연구 : 2009년)

▲ 경력 
  - 1982년 한국토지공사(현 LH공사의 전신) 입사
  -  경제자유구역사업 총괄 책임자 및 충북지역본부장 등 주요 보직 거쳐 2008년 퇴직
  - 토지공법학회와 고고학회에서 비상임 임원을 맡는 등 개발업무 전문가로 활동
  - 건국대, 서울디지탈 대학, 한국사이버대학교 겸임 교수(부동산 공법) 역임

▲ 저서 발간
  - 보상업무의 전문화와 공공건설사업의 보상사업비 산정(한국토지공사) 
  - 공공용지취득 및 손실보상제도 개선방안 연구(건설교통부)
  - 부동산과 사회(대학교재 : 부연사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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